맥머피를 꿈꾸는 렛처드의 명상록
리더십과 권위, 그리고 그에 대한 순응과 저항의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큰 생각거리이자 고민거리다. 내 짧은 인생을 통해서 다양한 리더십과 권위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수십 수백 번이고 어떤 권위가 옳은 것인지 고민했었다. 또, 다양한 형태로 자유를 노래하는 영화, 시, 음악 등을 접하면서 과연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대학교 1,2학년 때는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주도해서 나설 용기는 없어도, 가끔 고향에 내려갈 때 부모님과 함께 크고 작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3, 4학년을 지나면서 나 스스로 크고 작은 집단의 리더가 되어보기도 하고, 나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여럿 만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던 방식만이 정의는 아니구나’라는 새로운 충격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참 당연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걸 보면 나는 참 뭘 모르고 자고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지도자나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태도도 나무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이 영화가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이 참 놀라웠다. 만일 어떤 정치적인 사건을 다루거나 급작스러운 시위라도 벌였더라면 나는 보던 중 거부반응을 일으켰을 것이 틀림없다. 상황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지 않았기에 더욱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가 참 어두움에도 맥머피라는 인물 한 사람이 주는 유쾌함이 얼마나 밝던지.
그러나 솔직히 나는 맥머피만이 영웅이고 간호사 렛체드는 냉혈한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도 장발장은 천사고 자베르는 악마라고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처럼. 당시 난 장발장보다 자베르에게 심한 연민을 느꼈다. 내가 원래 모범생처럼, 주어진 사회 규칙에 순응하며 살아오던 ‘가락’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권위를 갖고 원칙을 적용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요, 그들 스스로가 그것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권위 그 자체만 놓고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이나 성(性)이 주는 폐해가 있지만 그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권위도 권위를 부여 받은 사람이 이를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권위가 주어지면 이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는 뒤틀린 욕망이 존재하며, 역사를 보더라도 수많은 왕과 군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탈취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 스스로가 맥머피보다는 렛처드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나에게도 영화 속 맥머피의 행동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으며, 렛처드보다 그가 낫다, 아니 심지어 옳다고까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규율과 원칙을 사람 위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규칙은 필요하지만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이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권위는 억압이요 강제며 오히려 역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그저 통제를 위한 통제는 얼마나 가식적인지. 렛처드의 영혼 없는 미소처럼.
나 역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직함을 부여 받아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싶었던 것인데 의도치 않게 그들에게 감시 당한다는 느낌을 주고 말았다. 교활하게 머리를 굴려서 했던 행동이 아니라 나조차도 새로이 알게 된 나의 성향이었기에, 그 이후로 좌절을 겪고 내 행동을 돌아보며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사람이 사람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본래 갖는 자기 성향과 자유의지를 그 누가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을 배우지 않고 통제부터 시행하려 했던 것에 있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적용되는 권위는 공동체 내에 자발적인 질서를 만들어 간다. 그러나 사실 이마저도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서나 엿볼 수 있을 뿐 국가와 같은 큰 단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앞으로 나에게는 권위가 주어지기보다 권위 하에서 따라가야 할 상황이 더 많을 것이다. 권위주의적 체계로 얽혀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더욱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로부터의 통제가 아닌 아래에서부터의 저항이 사회를 변혁시켜 왔다는 것을 믿는다. 서로 간 신뢰를 바탕으로 권위가 선하게 작용하는 사회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헛된 꿈일 뿐인지 의구심마저 들지만, 적어도 ‘가만히 있으라’는 지침이 항상 옳은 것처럼 입다물고 살다가 억울하게 ‘죽임당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시도는 해봤잖아. 최소한 노력은 해봤다구.”라던 맥머피처럼. 통제와 감시 하에서도, 자유를 갈망한다면 최소한의 시도를 면면이 이어가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