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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목적이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더이상 좌절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편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논쟁을 피하고 거절을 못하며 비평을 하지 않는다.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격려하며 힘든 말은 피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 (잠 15:1)라는 잠언이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성경적인 뒷받침을 해준다. (162)

 

우리는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랑할 때 선한 마음이 자라게 된다. 그래서 정결함과 부요함과 온전함을 느낀다. 우리의 느낌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고 누구에게 말하는지를 자기보호가 지배하기 시작하면 괴롭고 불편한 감정이 우리 영혼에 스며들며 안도감을 얻도록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때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투명함을 강조하는 교제권 안에 속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우리의 실망을 나누면서 진정한 사랑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격려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강요하는 영혼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사람들이 우리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을 때 원망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로 인해 놀라고("다른 사람들이 나의 분노를 알면 나를 더 거절할 거야") 우울이나 신경증이나 강박 관념 아래에 그것을 숨긴다. 또 어떤 사람은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직선적으로 표현한다. 자기를 낙심시킨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반항하며 불쾌감으로 부루퉁하게 대한다. (163-64)

 

어떤 사람들은 내면의 추함을 직시하기를 거절하고, 죄성보다는 갈등에 대해 생각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자신감이 없어. 그래서 불안해." "나는 왜 그렇게 완벽주의자일까?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미치겠어." 이 같은 문제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에 대해 과장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한다. 반면에 죄를 드러내는 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갈등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느끼지만 죄인들은 추함을 느낀다. (177)

 

내 방법이 때로는 너의 관심에 무심한 것처럼 보일 것을 안다. 네가 극도로 피곤할 때 걸어가라고 불러도, 네가 나를 신뢰하기 바란다. 네가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어려움이 생길 때도 나를 신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네가 나의 권위에 복종할 때까지는 나를 신뢰하는 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다. 신뢰는 강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제 네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내가 명령을 내리면 너는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너는 점점 나와 함께하는 교제의 풍성함과 나의 선함을 맛보아 알게 되고 나를 깊이 신뢰하게 될 것이다. (184)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나름대로 확고한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 계획은 우리의 성격에 유전적으로 배어 있는 인생에 대한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계획에 협조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사랑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행복에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 마음은 우리의 고통에 무감각하시고 우리의 불평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열심히 간청하는 것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한다. (192)

 

문제의 핵심은 우리 영혼의 상한 심령이 아니고(마음이 상하는 것이 정상이다), 안도감이나 만족에 대한 욕구도 아니며(목마른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강요하는 마음에 있다. 지금 당장 목마름을 해결해 주도록 강요할 때 우리는 성경적인 윤리에서 실용적인 도덕관, 곧 고통을 없애는 것은 무엇이든 정당하다는 사고방식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종종 도덕적 타협과 타락한 인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193)

 

하나님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좋게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천진스러운 낙관론자는 실제 삶보다 달콤한 소설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현실의 경험이 그의 태평함을 산산이 부숴 놓는다. 행복한 낙관론자의 믿음은 마치 케이크 위에 장식된 크림처럼 달고 멋지지만 건강에 필요한 영양이 결핍되어 있다. (194-95)

 

고통받는 성도가 영혼의 애통을 쏟아 놓을 때, 우리 주님은 그를 어루만지고 돌보시는 대제사장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슬픔이 원망과 강요하는 심령으로 바뀔 때, 하나님은 마치 병을 고치기 위해 날카로운 메스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같이 우리를 대하신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3) (198)

겸손을 배우는 첫 단계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달라지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고소이며 하나님이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잘못 다스리신다고 비난하는 셈인 것이다. (200)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실 때는 결코 반만 치료하고 그만두시지 않는다. 수술하는 의사는 "암을 거의 제거했다"며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짓된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고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사정없이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근거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다 이해하시지만, 우리의 교만한 강요의 태도를 사정없이 드러내심으로 치유를 시작하신다. 우리가 강요하는 심령을 깨닫고 싫어하여 그것을 버리고 우리의 깊은 욕구들을 주께 맡겨 드리면, 그분은 우리의 내면을 정결하게 해주신다. (201)

하나님은 이상한 문장으로 두 번째 관문을 마치셨다. "[하나님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욥 41:34). 교만한 사람은 강요한다. 그들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무엇을 하시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셨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기초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지와 상관없이 어느 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나 배우자가 술을 끊는 것이나 반항하는 자녀가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 등을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다. 물론 그 문제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은 좋지만 강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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